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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돌아다닌 여행기/2012 후쿠오카-나가사키

[나가사키] 4일차 원폭공원, 평화공원, 원폭자료관

4일차 2부를 쓰는데, 여행기의 시각은 이제 오전 8시 정각이다.

보통은 1부가 점심 즈음해서 끝나는데....

역시 일찍일어나서 여행할 수 록 이것저것 많은걸 보고 느낄 수 있는 것같다. 당장 여행기를 쓰는데에도 그 차이점이 느껴진다.

물론.. 이 경우는 너무 빨랐지 않나 싶지만.


각설하고, 우라카미천주당을 나와서 원폭낙하중심지공원 (이하 원폭공원) 으로 향한다.




이 길 대로 공원을 향하게 되면, 원폭공원으로 들어가기 직전 한 소녀상과 무수히 많은 종이학이 걸린 장소를 지나게 된다.






평화를 기도하는 아이. 라고 적혀 있다.


...


원폭자료관으로 향하는 계단 옆에는 종이학을 품은 백색의 소녀상이 평화를 빌고 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뒤 10년 후에 방사능 후유증으로 사망한 사다코(禎子)라는 소녀의 상이다. 방사능 후유증으로 백혈병에 걸린 사다코는 죽음을 앞두고 종이학을 접었다. 사다코는 천 마리의 학을 모두 접으면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망으로 종이학을 접었지만 결국 종이학 600마리 정도를 접다가 생을 마감했다. 


종이학 접기는 일본에 전해져 내려오는 유명한 전설에서 비롯된다. 누군가 병이 들어 아플 때 종이학을 접으며 병이 낫기를 기원하면 천 마리 학이 모두 완성됨과 동시에 병이 낫는다는 믿음이 일본에 전해지고 있다. 사다코의 사망 소식을 들은 일본 국민들이 소녀를 가엽게 생각하여 소녀가 미처 다 접지 못한 학을 접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민들이 접은 종이학을 원폭 투하지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전해주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종이학을 접는 안타까움 속에 만들어진 것이 바로 이 종이학을 품에 안은 소녀상이다. 지금도 소녀상의 기단 아래에는 일본 전국 각지에서 보내온 울긋불긋한 종이학들이 걸려 있다. 이 슬픈 종이학들은 철봉에 함께 매듭같이 묶여서 아픔을 같이하고 있다. 


...

출처 - [일본 가는 길 95] 나가사키 원폭낙하중심지공원 기행


여행기를 쓰면서 새로 알아가는게 많다. 거꾸로 말하면 사전조사를 많이 하지 않았다는 건데.





이런 식으로 종이학이 겹겹히 매어져 있다. 비오면 젖고 바람 불면 찟기는 위치인데도 이렇게 잘 버티고 있다. 몇일전 일본 태풍에도 견뎌냈으려나.




소녀상과 그 근처에 있는 또다른 장소들이다. 잘보면 물통이 상당히 많이 놓여 있다. 얼핏보면 어디 교양없는 여행객들이 쓰레기를 두고 가나 싶기도 하지만, 이곳 원폭관련 장소를 관광하다보면 계속해서 눈에 띄게 된다. 물통이 이렇게 많이 있는 이유는 뒤에 실내 원폭 자료관을 들려서, 한 영상을 시청하면서 알게 된다. 


폭심지 중앙(좌) 와 우라카미천주당의 피폭후 남은 기둥(우).


당시 원자폭탄은 최강의 살상력을 갖기 위해 지면이 아닌, 439m 상공에서 폭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 오기 직전에 들렀던 우라카미천주당의 피폭잔해의 일부. 피폭후 우라카미천주당은 거의 무너져 내리고 이 기둥 잔해만이 남았다고 한다. 이후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기둥사진 우측 구석에 종이학을 걸어두는 장소가 또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이곳에 걸어둔 걸까.


공원 한쪽에 폭발의 범위와 피해정도가 그려진 지도가 있다. 



찍은 사진을 구글지도 위에 겹쳐서 합성해보았다. 지도가 일본어인데다가 지명표시도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번은 이렇게 표시해보고 싶었다. 색의 농도 구별이 조금 어려워 졌지만, 거의 대다수의 지역이 '완전한 파괴와 불탐' 으로 되어있다. 그 멀리 있던 나가사키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완파라니... 물론 당시의 건축물이 현대보다 단단하지 못했을 수 도 있지만, 그래도 1945년이면 상당한 현대식 건물이 있었을 텐데, 완파와 전소. 완파는 둘째 치고 전소의 의미로부터 사람은 거의 생존하지 못했을꺼라 추측된다.



원폭 공원을 빠져나와 아주 조금만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가사키 평화 공원이 나온다.




이렇게 각 나라에서 보내온 세계평화심볼이 공원 곳곳에 전시 되어 있다. 전부를 둘러본건 아니지만, 한국작품은 없는 것 같다.





찾아보니 나가사키의 종, 이라고 하는 모양. 여기도 물이 들어 있는 물통이 한가득이다. 여기서부터 친구와 내가 의아해 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이유는 불문. 뭔가 의미가 있겠지 하면서 일단 계속 움직 였다.



공원의 최대 심볼. 이곳에 왔다면 누구나 다 이 구도로 똑같은 사진을 찍으리라 생각되는 곳에 도착 했다.




평화기념상 작가의 말

 저 악몽같은 전쟁

  소름 끼치는 처절함과 비참함

육친을, 남의 아이를

뒤돌아 보는 것 조차 견디기 힘든 심정

 어느 누가 평화를 바라지 않을 수가 있을까

이곳에 전세계 평화운동의 선구로서

이 평화기념상이 탄생했다

산과 같은 성철

그것은 강인한 남성의 건강미

전체길이 삼십이여척

오른손은 원폭을 가리키고 왼손은 평화를

얼굴은 전쟁희생자의 명복을 빈다

 여기 인종을 초월한 인간

  때로는 부처 때로는 신

나가사키가 시작된 이래 최대의 영단과 정열

 이제 인류최고의 희망의 상징


1955년 봄날에

기타무라 세이보(北村 西望)


평화기념상의 옆에 놓여진 설명을 찍은 사진을 그대로 타이핑 했다.

큰 띄어쓰기에 어떠한 의도가 담겨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폰트를 제외하면 거의 같다.


여러가지 생각이 든다.

그야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곳에 살던 수많은 민간인들이 죽었다. 수 많은 이 아니라, 수 만명의 민간인이 죽거나 큰 상해를 입었다. 이 중엔 전쟁에 반대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전쟁을 두려워 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김씨부족과 박씨부족이 서로 이권 다툼을 하며, 매일 같이 싸운다. 박씨 부족이 항상 시비를 걸고 넘어져서 남정네들끼리 대판 싸움이 일곤 하는데, 아낙네들은 각자 남편 먹여주고 치료해주기 급급하다. 물론 자신의 부족이 이겨서 이권을 가져오면 남편도 좋아하고 다들 좋아하고 본인의 생활도 나아 질것 같으니, 딱히 이권 다툼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한번 싸움이 나면 시끄럽기도 하고, 좀 불편하다.


그러던 어느날, 김씨부족이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다이너마이트라는 걸 가지고 아낙네들이 모여서 빨래를 하던 계곡에 던져서 폭사 시킨다.


물론 박씨부족도 일전에 싸움을 하면서 던진 돌이나 유리파편 칼 등에 김씨 아낙네들도 다쳤고, 누가 잘 했다고 할 건 없다. 그래 사실 이권을 위해서 먼저 선진 문물을 찾아낸 쪽이 이기고, 언젠가는 끝냈어야 하는 이권다툼이었다.


어쩌면 미국에서 그런 식으로 전쟁을 끝낸 통에, 일본은 더이상의 자금을 전쟁에 쏟지 않고, 지금의 일본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뭐, 정치 역사 사회 경제는 내 지식분야 밖이므로 더이상은 안쓰겠지만, 어쨌든 당시의 폭발과 그 피해의 광경은 그것을 보는 모든 이들에게 평화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누가 먼저 시작 했건, 누가 야기 했건 간에.


물통의 의미를 알고나서, 찍은 사진의 물통을 볼때마다 더욱 더 안타까움을 느낀다.




나가는 길에 평화의샘(平和の泉) 을 찍었다. 이 길로 평화공원을 빠져나와 아침에 들어가지 못했던 원폭자료관을 향한다. 

이때 시간이 9시. 아직도 아침이긴 하네.



평화공원에서 원폭자료관까지는 매우 가깝다. 직선거리로 500m 도 안되는 거리. 아침에는 우라카미 천주당을 들리는 길이라서 조금 멀게 느껴졌었다.




찍은 사진이 없어서 구글 스트리트뷰로 대체. 구글맵에게 신세를 많이 진다. 

200엔을 내고 자료관으로 입장한다.


자료관 내부는 사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글 스트리트 뷰로 건물내의 자료들을 거의 대부분 볼 수 있다?! 입장하는 장소부터 시작해서, 게이트를 지나서 순서대로 관람할 수 있네. 물론 직접가서 보는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자료관의 자료들은 거의 대부분 실제 피폭 물이다. 거의 68년정도 지난 물체의 방사선량이 걱정 된다면, 스트리트 뷰로 보길 추천한다. 


여러가지 원폭의 무서움을 알 수 있다. 폭심지로 부터 수십 킬로미터에서 나무판 설치형 건물에 서있던 보초병이 있었다. 이 보초병은 폭심지를 향해 서있었는데, 폭발 직후 나무판에 보초가 가리고 있던 부분만 남기고 빛에 의해 그을려 있다. 그런 자국이있다.


뿐만 아니라, 유리병이 녹아 사람의 손뼈와 융합되있는 화석등 원폭이기에 일어난 갖가지 무서운 현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물론 폭심지와 파괴력, 각종 시뮬레이션도 한켠에 마련 되어 있었다. 




전시 되있던, 잔해에서 발견된 벽걸이 시계. 두시계 모두 11시 02분에 멈춰 있다. 이 시간에 폭발이 일어났고, 그 충격으로 인해 고장이 나면서 폭발 시간을 기록한 물건이 되었다. 이런것에 의해 "나가사키의 시간은 11시 02분에 멈추었다." 라는 식의 표현이 곳곳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 난다.


구경을 하고, 특별 전시관인가 그쪽으로 향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하얀색의 벽이고, 각각의 방이 있고, 그안에 영사기가 있어서 각각의 어떤 영상을 틀어 주고 있다. 어르신들이 단체 관람으로 오셨는지 어떤 방에는 어르신이 많고, 또 어떤방은 텅텅 비어 있었다. 그중에 한 방에 들어가 영상을 관람 했다. 해설이 일본어였던 것 같은데, 영상과 내 미약한 일본어로 그럭 저럭 알아 들었다. 여기서 물병의 의미를 알게 된다.


폭발 직후 살아 있던 생존자들은, 그러나 이미 고에너지의 피폭을 당했기 때문에 체내의 수분이 상당수 증발한 상태이다. 당연히 수도시설은 고장이나고 주변에 물을 가진 물체도 모두 증발. 남겨진 피폭의 생존자들은 모두 물을 갈구하며 죽어 갔다고 한다.


 "물을 주세요..(水を下さい..)"


라고 영상에서 끊임 없이 나온다. 

그리고 비로소 우린 지금까지 지나왔던 기념비들 앞에 놓인 물이 담긴 페트병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물을 원하며 죽어갔기 때문에..


원폭자료관을 나와서, 민속자료관과 추모관중 어느쪽을 먼저 갔는지 모르겠지만, 두 곳 다 기억은 있는데 찍은 사진이 없다. 특별하게 대단한 것 도 없었다.


추모관은 말그대로 원폭으로 인해 죽어간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건물이다. 상징적인 건축물과, 추모를 위한 장소, 지속적으로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만들어 내는 작은 폭포(이것 역시 위에서 설명한 '물'의 의미로 부터 나온다.) 등이 있다. 

확실히 엄숙하고, 그 목적이 박물관과는 다른 느낌이다.


계속 위에서 물이 떨어지면서 작은 소리를 낸다. (반사되서 보이는건 스트리트뷰를 찍어내는 장치)


또 민속자료관으로 향했다. 관람료가 무료였기 때문에 쭉 둘어 보았다. 사실 여긴 들어갔던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데, 타 블로그에서 찍은 내부사진중에 하나가 기억이 났기 때문에 간건 맞는 것 같다. 블로그 설명에 따르면 이곳은 원폭과는 관계없는 순수한 민속자료관이라 한다.



11시 쯤 해서 관람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를 위해 나가사키역으로 되돌아 가는 길을 밟는다.

가는길에 점심으로 먹기위해 나가사키 짬뽕 가게를 찾아보려 한다.